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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연기

[2000 한국연극 연재1] 김석만 교수 자유로운 사람의 표현을 위하여

by 킹피쉬1 201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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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 4월호 연재 원고

자유로운 사람의 표현을 위하여  
                                                                                                             김석만(연극원 연출과 교수)

 

1. 연재를 시작하면서.....


연기에 대한 글의 연재를 시작한다.
나는 연출가이다.
연출가는 희곡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연기자와 가장 많이 시간을 많이 보낸다.
대본을 처음 나누어 받는 날부터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연기자와 함께 지낸 시간은 고통과 영광의 시간이다.
작품을 분석하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의 목적을 규정하고 블로킹을 긋고 총연습에 들어가고 막이 오르기까지, 연출가와 연기자는 때로는 혁명의 동지처럼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류에 회의를 느낄만큼 미워하기도 한다. 서로가 배울 때도 있지만 서로에게 짐이 될 때도 있다. 

공연이 끝나고 연출노트를 정리하다가 프로그램에 나온 연기자들의 사진을 보면 연습도중에 겪었던 잊지 못할 사건들이 떠오른다.
기자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왜 그렇게 넘어 갔을까. 그때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해 주지 못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을까.
연출가는 때로는 연기자에게 군림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연출가라는 입장에서 연기자가 납득하지도 못하는 주문을 한 적도 있다.

연출을 한답시고 연기자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연기자들을 격려해주지도 못하고, 또 시간이 없다고 일방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연기의 쟁점에 관하여 토론이 벌어졌을 때, 논리를 앞세우고, 이론을 들먹이고, 자신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 뱉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으로야 연극을 함께 만드는 동료들을 무시하려 한 적이 없지만 미묘한 연기체험의 순간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결과적으로는 연기자를 무시한 꼴이 된 적이 왜 없겠는가.

어떻게 하면 연출의 설득력을 높이고 연기자가 연기에 편하게 접근을 할 수 있게 안내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관심에서 연기에 관한 글을 써 보기로 한다.


앞으로 쓰는 글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자의 연기 접근 과정을 이해하여 창작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긴장을 없애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연출가의 입장에서 연기자의 작품 분석과 연기 접근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연기이론에 대하여 강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연기에 대한 이론을 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연기에 대하여 이러 저런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고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분석의 한 방법을 함께 이해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매월 연재되는 글은 독립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서로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를 보면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연기는 공부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울 수는 있다고 믿는다. 연기자 자신의 체험이 바로 좋은 스승이다. 

연극과 같은 찰나의 예술에서는 순간의 진실밖에 자랑할게 없다.
연기의 세계를 더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은 건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연기자들과 연습장에서 겪은 체험을 정리하는 글을 오래 전부터 써 보고 싶었다.
비록 확신은 없지만 용기를 내어 경험을 토대로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건 내가 잘 안다"고 말을 한다. 연출가는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줄 알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불확실한 것이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오히려 확실한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다.

이 글은 연기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룬다. 따라서 불확실하고 완전하지 못하다. 연기에 대하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원탁의 기사>나 <라프타> 등지에서 수없이 나눈 이야기들도 그 중에 들어 있다.

또 그러한 이야기가 더 활발하게 토론되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연재하는 글에서 희곡 몇 편이 교재처럼 사용될 것이다. 함세덕의 <동승>, 셰익스피어의 <햄릿>, 입센의 <유령>, <민중의 적>, 체홉의 <벚꽃동산>, <세 자매>가 지금 희곡 후보들이다. 연기자는 물론, 연출가, 극작가,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독자들의 반응도 기대한다. 관심 있는 분들이 글에 대한 비평과 제안을 해준다면 필자로서 더 이상 고마움이 없을 것이다. 금년 말까지 다룰 주제는 다음과 같다.

극적 행동의 이해
표현의 동기와 목적
연기의 주어진 환경
연기자의 작품 분석
햄릿의 독백 분석과 내면의 독백
등장인물의 전사(前史)
등장인물의 이해
감정과 생각
연출가의 설득력 

2. 연기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

연기와 연기자들에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순서없이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 질문에 누구든지 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
하는 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좋은 연기와 나쁜 연기는 구별 가능한가?
무엇이 좋은 연기이고 무엇이 나쁜 연기인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관객을 사로잡는 연기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연기자의 카리스마는 무엇일까?
연기를 잘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연기자의 연기는 누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연기자는 무대에서 어떻게 등장인물이 되는가?
과연 자신을 버리고 등장인물이 된다는 표현은 맞는 말인가?
무대 위에 선 연기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연을 하지만 관객은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 연기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는가?

모두 만만한 질문들이 아니다. 연기자나 연출가들은 연기와 관련된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자신이 없어한다.

말로는 느낌의 세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기의 본질이 설명하기에 어려워서 그럴까. 연기교재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선뜻 어떤 책을 추천하기도 망설여진다. 또 읽어서 이해하기 쉬운 책을 찾기도 어렵고, 어렵게 서술된 책이나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책들은 알고자하는 의욕마저 꺾어 놓는 수도 있다.


연기자들에게 "연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답을 들을 수 있다.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사람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사람
관객의 감정을 주관하는 사제
칭찬과 갈채를 먹고사는 사람
어두운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과 같은 존재
..............

만일 나에게 지금, 그 질문을 한다면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답하겠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 은 '상처를 쉽게 받는 마음'과는 다르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은 연기의 세계에서 미묘하게 느끼는 감정의 상태를 말한다.

이는 느낌의 세계에서 어떠한 자극이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함을 의미한다.

상처받을 수 있는 지경까지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고서 어찌 등장인물을 창조할 수 있을까.


연기는 때로는 쉬워 보인다.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연기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연기를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솟는다. 그렇다. 사실 누구나 다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연기를 할 수 있다' 는 사실과 '연기를 잘 한다'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더구나 연기를 '제대로' 접근하기는 말처럼 쉽지는 않다.

3. 연기의 어려움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에 나온 꼬마 주인공은 인터뷰에서 '연기하기는 아주 쉬워요. 뭐, 뭐 하는 체 하면 되는 걸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듯이 고민하지 않고 연기에 임했다고 보인다. 어른들도 그런 상태에서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이의 천진난만성을 잃어버린 어른들은 긴장상태에서 각오를 다짐하며 영감을 떠올리려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예술가들은 영감이 날 때 작업을 한다.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창조적 휴지기간을 적절하게 사용을 한다. 영감을 가지고 창조행위를 하는 건 연기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 필요할 때에 언제나 바로 영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다른 예술가처럼 영감을 찾거나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영감의 주인이 되어 이를 마음대로 부려야 한다. 이것이 연기예술의 신비스러운 비밀이고 어려움이 아닐까 한다.

연기의 중요한 어려움은 하나 더 있다.
연기자 자신이 연기의 도구이자 사용자라는 사실이다. 연기자는 자신을 도구로 하여 등장인물을 만들어 내고 그 등장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용자이다. 여기에 연기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연기술의 이해와 실행에 어려움이 따른다.

'연기자는 등장인물이 되어야 한다. 등장인물로서 먹고, 마시고, 걷고, 꿈을 꾸어야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마치 연기자는 등장인물과 일치하여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자는 어디까지나 연기자일 뿐이다. 결코 등장인물이 될 수가 없다. 아니 되어서도 곤란하다.

김 아무개라는 연기자가 이순신 역을 맡았다고 해 보자.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이 "너 진짜 이순신이다"라고 칭찬을 해댈 때 그 친구들이 실제로 이순신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통용되고 연기자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만일 연기자가 정말로 등장인물이 되었다고 믿고 등장인물처럼 행동한다면 아마 두 가지 경우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연기자에게 무당처럼 신이 내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상실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일 것이다. 

연기자의 임무는 그가 맡은 등장인물을 올바르게 창조하는 일이다.

연기자가 등장인물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등장인물을 창조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연기자는 등장인물의 극적 행동을 창조함으로서 등장인물처럼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서 관객은 연기자를 등장인물로 보아주고 믿게된다.

연기자가 창조하는 것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이다.

등장인물이 해야 할 행동을 올바르게 수행하느냐 수행하지 못하느냐에 연기의 성패가 달려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 제대로 수행되었을 때 관객은 감동을 받는다.

<나 홀로 집에> 나왔던 꼬마 연기자처럼, 아마추어 연기자들도 종종 아마추어 연극에서 때묻지 않은 연기표현으로 감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때 아마추어 연기자들은 연기를 잘 해서가 아니라 연기를 '제대로' 해서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연기를 '제대로' 한다는 말은 바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뜻이다.

전문 연기자가 공연에서 프로의 기량으로 무대와 객석을 압도했다 하더라도 그가 맡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제대로 창조하지 못했다면 감동은 커녕 외면을 받는다.

좋은 연기와 나쁜 연기를 가르는 기준을 대라고 하면 감히 연기자가 등장인물의 행동을 올바르게 수행했는지 아니면 행동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하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겉모습만 닮으려고 애만 썼는지를 판단해 보면 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공연을 보면 연기와 극작의 관계가 선연히 눈에 들어온다. 

4. 연기자의 경험과 등장인물의 경험.

연기자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수행할 때 자신의 경험을 총동원한다.
두 가지 경우의 예를 들어 연기자의 경험과 등장인물의 경험의 차이를 설명해 보겠다. 

지금부터 십 수년 전 지금은 영화배우로 알려져 있는 문성근이 연극만을 열심히 할 무렵 <한씨연대기>에서 한영덕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와 기원전 그리스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던 폴루스(Polus) 라는 연기자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한씨연대기>에서 문성근이 맡은 한영덕은 평양 김일성 대학교에서 의학을 가르치던 의사교수였다. 가족과 헤어져 단신 월남한 그는 무면허 의사와 동업을 하다가 무면허 의료행위로 병원이 문을 닫자 동업자에게 간첩으로 모함을 당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다. 기관에 끌려가 간첩혐의자로 모진 고문을 받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다. 간첩 혐의에서는 풀려나지만 불법의료행위를 한 죄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때 친구 서학준(박용수가 맡았음)이 면회를 와서 한영덕이 월남하여 재혼한 아내의 해산 소식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한영덕은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서 통곡을 한다.

  어느 날 대전 지방 공연에서 한영덕은 그 장면을 연기하다가 진짜로 울어버리고 말았다.
진짜로 울어대니 무대에 있던 상대역과 무대 밖에서 보고 있던 스태프, 관객 모두 숙연해져서 한없이 통곡하고 있는 한영덕, 아니 문성근을 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문성근은 진정하고 다시 한영덕이 되어 역할을 끌고 나갔다.

  공연이 끝난 후 문성근은 한영덕을 면회온 서학준이가 "낼모레, 네 아내가 해산할 모양이야. 아들이었으면 좋겠니, 딸이길 바라니?" 라고 묻자 자신이 맡은 한영덕의 처지가 처량하게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당시에 감옥에 갇혀 게시던 아버지 문익환 목사가 생각이 나자 걷잡을 수 없이 통곡이 나왔다고 했다. "그건 연기가 아니죠?" 라고 문성근이 물었을 때 연출인 나는 그 때에는 속시원하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기원전 그리스 아에게나에 살았던 폴루스는 에스킬러스의 <오레스티아 삼부작>에서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를 맡았다.
시 그리스에서 연극을 할 때 남자 연기자가 가면을 쓰고 여자 역할을 할 때였다. 
  엘렉트라의 어머니 클류템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을 죽이고 남동생 오레스테스를 쫓아낸다.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가 성인이 되어서 돌아오면 동생과 힘을 합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때가 이르러 오레스테스는 돌아온다. 그러나 집안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하여 오레스테스는 친구를 먼저 집으로 보내어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한다. 가족의 슬픔 속에서 진정한 복수의 의지가 남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오레스테스는 친구에게 짐승의 뼈를 담은 항아리를 자신의 유골 항아리라고 전하게 한다. 남동생의 뼈를 담았다고 하는 항아리를 받은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슬픔을 호소한다. 이를 보고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신원을 밝힌다.
이 역할을 수행할 때 폴루스는 그 소품 항아리에 자신의 죽은 아들의 뼛가루를 담은 작은 항아리를 넣어서 등장하였다. 공연을 본 당대의 관객의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항아리를 마치 오레스테스의 유골인양 끌어안았다. 그래서 그는 무대를 슬픔의 모방과 겉모양이 보이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슬픔과 진실한 비탄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다. 비록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지만 진정한 슬픔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위의 두 가지 경우의 차이를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폴루스의 경우나 문성근의 경우 모두 무대 밖의 연기자 자신의 삶과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의 삶을 혼합하려는 연기자들의 진지한 노력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단지 두 사람의 차이를 구별하라고 하면
폴루스의 경우는 자신의 정서를 등장인물에 이용한 경우이고, 문성근의 경우는 등장인물의 정서가 자신의 정서를 움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5. 연기자의 조건

연기자의 임무가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의 행동을 제대로 수행하여 등장인물을 믿도록 보이는 것이라면, 공연에 출연하기 직전의 연기자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수행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한 준비 상태에서 연기자는 무대에 나가, 준비한 등장인물의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행동의 수행이 제대로 완수되었다면 이는 비유컨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말 할 때의 상태에 버금갈 것이다.

 무대 위에서 해 야 할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기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일은 바로 행동의 수행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기위하여 쉽지 않는 준비과정을 거쳐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을 끝임 없이 해야한다. 타고난 재능과 선천적 소질은 도움이 되는 항목이지 절대적인 덕목은 아니다. 운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도 탁월한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지옥훈련과 도 같은 연습을 꾸준히 해야한다. 

연기자에게 근본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연습은 행동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연습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최상의 상태에 이르도록 창조하기 위하여 연기자는 강하고 듣기 좋고 울리는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선 불과 몇 달만의 연습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다듬고 이를 매일 매일의 연습과 공연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가꾸는 연습뿐 아니라 모든 연습은 의지를 가꾸는 일과 맞물려 있다.
연기자는 어떠한 행동이라도 수행해 낼 수 있는 신체를 유연하게 단련해야한다. 고난도의 기술을 배우는 연습이라기보다 자신의 신체적 조건 속에서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닌 우아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크게 울릴 수 있고 감미롭게 속삭일 수 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우아한 움직임을 항상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연습을 하고 준비하는 연기자와 산송장에서나 나올 듯한 울림이 없는 목소리와 굳어져 가는 신체를 지닌 연기자를 구별하기는 물과 불을 구별하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테크닉은 기술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사용하는 지식과 그 도구를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라고 정의를 내려보자. 

목수를 예로 든다.
목수는 제일 먼저 목수 기술에 쓰이는 망치, 톱, 대패, 끌 등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이 도구의 사용법보다도 이 도구를 어떻게 잘간수하는지를 먼저 배운다. 써는 톱과 켜는 톱의 날이 선 각도가 어떻게 서로 다르고 톱날의 숫자와 톱의 크기가 켜거나 썰어야 하는 나무의 굵기와 어떠한 상관이 있는지를 배운다.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도구를 다루는 방법은 비교적 나중에 배운다. 실습을 통하여 초보자는 대목으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장래가 있는 목수는 항상 자신이 습득한 기술을 점검해보고 또 실행해 보면서 자신감을 쌓아간다. 능력 있는 목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과 모르는 기술을 구분할 줄 안다. 목수는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기술과 해 낼 수 없는 기술이 무엇인지를 안다. 올바른 목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만을 사용하지 결코 모르는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확실하게 잘 다룰 줄 아는 기술을 더 연마하는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이 잘 해 낼 수 없는 기술을 찾거나 다른 재주를 익히느라고 마음을 쓰지 않는다.

연기자에게도 테크닉과 재주, 기술에 대하여 관심이 없을 수 없다.
감히 말하건대 연기자에게 필요한 재주는 오직 노력하려는 재주일 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연기술을 습득하는데 자신을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만 필요하다.

더 간단하게 말한다면 어느 누구도 할만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면 연기를 할 수 있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도 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다. 의지가 부족해서이다.

연기자들은 소위 재주와 기술에 대한 사항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다.

춤을 배우고 소리를 배우고 운동을 하여 몸매를 가다듬는다. 이러한 일들을 하는 동안 의지가 다져지기도할 것이다. 춤과 소리, 운동과 신체훈련 등은 몹시 중요한 훈련과정이지만
행동을 수행할 의지와 행동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연습에 대한 이해가 없는 훈련과정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 연습은 결코 지적인 훈련이 아니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신을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6. 극적 행동의 이해

극적 행동과 행위를 구별하자. 

행위는 몸짓, 움직임, 동작 등등 눈에 보이는 현상이다.

이에 비해 극적 행동(dramatic action)은 목적을 지닌 행위이다. 

예를 들어본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미국의 흑인 육상선수들이 트랙의 어느 종목에서 금, 은, 동메달을 휩쓸었다.

이들은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올라가는 시상식에서 한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그 손을 주먹 쥔 채 높이 들어올리고 고개를 내리깔고 입을 굳게 다물고 서 있었다. 이들의 동작, 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이들의 행위는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신문에서는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다"로 기사 제목을 달았다. 여기에서 그 육상선수들은 "항의하다"라는 행동을 하였다. 그들이 보인 행위는 검은 장갑을 끼고 주먹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인 동작 등이었다.
위의 장면에서 행위와 극적 행동은 뚜렷이 구별된다.

극적 행동은 목적을 지닌 행위의 총합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잘못을 꾸짖는 교사 앞에서 어린 학생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부릅뜨고 교사를 노려다 보고 있다. 이 때 그 학생의 행동은 "교사의 꾸짖음에 반발하다"로 표현된다.

따라서
행위는 겉으로 드러난 동작이고 극적 행동은 마음의 작용이며 사고의 작용이다.
행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극적 행동은 마음으로 느끼거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한다면 극적 행동은 항상 동사로 표현된다. 

극적행동의 정의를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1) 목적을 지닌 행위이며,
2) 마음의 작용 또는 사고의 작용이고,
3) 동사로 표현된다.

극적 행동이 무엇이냐에 따라 행위가 결정된다. 
마음의 작용이나 사고의 작용을 규정하면 그에 따른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극적 행동이 분명하다는 것은 마음과 사고가 굳다는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도 마음만 확실하게 먹으면 행위는 자연히 수반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의지가 중요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극적 행동에 대한 질문은 항상 "?"를 수반한다.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어떠한 행위를 해야하나?" 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연습장에서 행동을 먼저 찾는 연기자와 행위를 먼저 찾는 연기자는 쉽게 구분된다. 걸음걸이와 말투, 앉은 자세와 태도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에 내면에서 작용하는 행동을 정확하게 정하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용어의 전달에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극 방법론에 대하여 많은 글들이 소개되었다. 내가 편역한 <스타니슬라브스키연극론>에도 신체적 행동의 수행법이란 항목이 나온다. 이 때 신체적 행동이란 영어로 피지컬 액션(physical action)을 번역한 것이다.

어떤 책에는 내면의 행동(inner action)이란 표현이 나온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러시아의 용어를 영국과 미국에서 제각기, 다른 시기에 여러 사람에 의하여 사용하여 번역한데서 다른 표현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면의 행동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상관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신체적 행동의 방법론 (Method of Physical Action)이라는 표현도 나타났다. 신체적(physical)이란 단어와 내면(inner)이라는 단어를 따로 떼어내서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오해할 소지가 생겨났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 뭐라고 이름지었다 해도 그 개념의 본질은 "극적 행동이 행위를 결정한다"다는 사실이다.
 피지컬 액션(physical action) 이나 이너 액션(inneraction) 이나 모두 같은 개념을 달리 번역한 용어일 뿐이다.

 이 말을 사전적으로 해석하여 다른 개념의 용어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에서는 두 용어 모두 극적 행동, 또는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행동'과 '행위'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행동과 행위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행동: 동작을 하여 행하는 일. 심리학에서는 행위와 구별하여 반사적, 본능적 동작이나 반응. 자극에 대응하는 생체의 근육 반응이나
내분비선의 작용 상태등을 말함.

행위: 품행. 행동. 넓은 뜻으로는 인간의 모든 동작을 가리키며, 좁은 뜻으로는 분명한 목적 관념 또는 동기를 가지고, 사려, 선택, 결심을 거쳐 의식적으로 행하여지는 의지적 동작으로서 선악에 대한 판단 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언행.


앞으로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구애받지 않고 극적 행동과 행위의 의미를
위에서 설명한 대로 사용하려한다.

(김석만 proksm@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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